금성산 보흥사의 괘불탱은 왜 다보사로 옮겨졌을까?
- 나나
- 2019년 5월 25일
- 2분 분량
문화재 엿보기
이계표 전라남도문화재위원, 호남불교문화원장

많은 보배를 품은 절, 금성산 다보사(多寶寺)
다보사는 절 이름이 많을 다(多), 보배 보(寶), 절 사(寺)로, 많은 보배가 있는 절이라는 뜻이다. 어떤 보배를 가지고 있어 다보사라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다보사에 소장된 지정문화재를 살펴보면 국가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제1343호 다보사괘불탱, 보물 제1834호 나주 다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소조십육나한좌상이 있고, 지방 문화재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0호 나주 다보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시왕상 일괄과 문화재자료 제87호 다보사대웅전이있다.
금성산 다보사의 보물 괘불탱의 원봉안터는 보흥사
다보사의 소장 유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보물 제1343호로 지정된 다보사괘불탱이 아닐까 한다. 이 괘불탱의 화기에 의하면 다보사괘불탱의 원봉안처는 금성산 보흥사로 기록되어 있다. 보흥사 괘불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다보사로 옮겨지게 되었고 2002년 7월 보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문화재 지정 당시 조사자들이 보흥사의 기록이 전무하여 그 소재를 확인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문화재 작명도 다보사괘불탱으로 정리하였다.
해주록에 기록된 보홍사 승려 32인의 행적은?
문화재청 대형불화 정밀조사 보고서 15-다보사괘불탱(성보문화재연구원, 2018년) 32쪽에서 금성산 보흥사의 기록이 전무하다고 하였으나 일찍이 보흥사에서 사집(四集)을 배웠고 나중에 해남 대흥사 12대종사(大宗師)의 꽃이라 불리우는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이기록한 '해주록(海珠錄)'('朝鮮佛敎叢報'第15號, 70쪽, 72-73쪽)에 나주 보흥사 승려 32인이 수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해주록(海珠錄)'을 통해 다보사괘불탱 조사 당시 살피지 못했던 기록이어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화험에 정통하여 화엄종주(華嚴宗主)로 존경받았던 상월새봉(霜月璽封 1686-1767) 대사가 선암사에서 1734년과 1754년 두 차례의 화엄법회를 개최하자 학인과 선사들이 구름처럼 운집했다고 한다. 1754년 3개월간 진행된 화엄경 강회에 참가한 대중 1287인 가운데 나주 보흥사 승려 32인이 참여하였다. 보흥사 스님들이 선암사에서 화엄경 공부할 때 거처했던 곳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집당(霧集堂):금함덕흥(金峯德興)/창파당(滄波堂):금계덕추(儲溪德楹), 금파태한(錦波泰閒), 천정(天淨), 유흡찰문(侑洽察文), 행관(幸冠), 등휘(等輝), 수징(守徵), 달평(達平), 맹한(孟閒), 석해(碩海), 일척(日陟), 치우(致祐), 혹순(玉淳), 복해(偏海), 일해(日海), 상눌(佾訥), 시명(始明), 덕수(德守), 본각(本覺), 묘희(𠴕熙), 운서(雲瑞), 묘찰(妙察), 섭잠(攝岑), 굉희(宏熙), 숙빈(淑彬), 쾌쉬(快守), 자겸(自謙), 복재(偏載), 맹일(孟日), 식명(識明), 월영(仴影)
나주 보흥사 스님 가운데 32명이 1754년 일시에 선암사에 화엄경 공부하러 떠나고 절에 남은 스님은 몇명이나 되었을까?

보흥사 괘불은 나주 불교의 실상을 밝히는 계기가 되어야
보흥사 스님들이 선암사에 화엄경을 공부하러 가기 9년 전 1745년(영조 21) 보흉사에 괘불을 조성, 봉안하였다. 이 괘불은 삼베 바탕에 채색한 대형불화였다. 전체 11,630× 8,027mm, 화면 10,866×7720 mm, 무게 1255 kg으로 장엄하고 거대한 불화로서 구성은 석가삼존불입상을 중심으로 윗부분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다보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짝을 이루고 있는 형식이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승려화가인 의겸을 비롯하여 9명의 화원이 함께 그렸다. 조선후기에 나주 금성산 보흥사에서 많은 승려들이 머물러 불교수행을 하면서 1745년에 보흥사 괘불을 조성, 봉안하였고 1754년 선암사 화험강회에 보흥사 승려 32인이 참여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통해 금성산에 꽃피운 불교의 실상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Comentar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