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일 의병장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 나나
- 2019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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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019년 5월 25일
리명한의 나주 인물열전

신(臣)이 오래 동안 나라 안의 인심을 관찰해 왔는데 전라도는 임진년 병란 중에 국가에 대한 공이 많았거니와 양반 중에서도 근왕(勤王)한 사람들은 역시 호남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색(聲色)의 차이 없이 호남사람은 반드시 거두어 써야 합니다.
-다섯 왕조의 영의정을 거친, 오리 이원익(梧里李元翼)이 임금에게 올린 글(조선왕조실록
82권 선조29년11월17일)
1. 어둠속의 횃불
1592년에서 1598년 까지 무려 7년 여에 달하는 임진왜란으로 온 국토는 황폐화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참담하고 치욕적인 비극이었다.
1592년 4월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서울을 향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을 때, 선조(宣祖)는 길을 가로막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평양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파천하여,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망명할 차비를 하고 있었다. 관군들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궤멸해버리고 망국의 비극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전국 각지에서는 뜻있는 사민(士民)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었는데, 그들의 뜻과 활약은 육백년이 흐른 오늘에 와서도 깊은 감동과 자성을 자아내게 한다.
수많은 의병들 가운데 영남 요충지 진주성(晋州城)으로 들어가 분전하다가 최후를 마쳤던 건재 김천일 선생(健齋金千鎰先生)의 죽음은 오늘날 강대국들의 농간으로 조성된 분단의 치욕 속에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청백리에서 의병장으로
의병장 김천일 선생의 자(字)는 사중(士重), 호(號)는 건재(健齋)로서 1537년(중종32년) 금성산 기슭 나주의 흑룡동에서 진사 김언침과 이씨부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열아홉에 당대석학 일재 이항 선생을 스승 삼아 수학, 37세에 이르러 남다른 학행이 조정에 알려져 군기시 주부를 제수 받았다.
38세에 용안 현감, 40세에 강원도사, 42세에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되었으나 받지 않고 임금에게 시국의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가, 그 해 가을 임실현감으로 좌천되었다. 46세에 순창군수, 48세에 담양부사로 임명되었으나 50세에 이르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53세에 다시 한성부서윤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권세가들이 법을 어기고 농지에 대한 과세와 부역을 기피하자 “왕명을 받고 내려온 관리로서 어찌 납세와 부역을 균등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권세의 편에 서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지 않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부당한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이후 고향 나주로 돌아와 있다가 56세가 되는 1592년 6월 임진왜란을 맞는다. 전세를 파악해보니 기가 막혔다. 순변사 이일은 상주에 진을 쳤다가 왜군의 일격에 방어선이 무너져 그들에게 북상의 진로를 터주었으며, 신립은 경상도에서 요충지 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로 후퇴하였다가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종묘의 위패를 싣고 피난의 길을 떠났다.
"안 되겠다! 내 목숨을 던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비록 본바탕은 무인이 아닌 신약한 선비의 몸이었지만 선생의 가슴 속에는 얼음덩이 같은 차가움과 불길 같은 혈류가 교차하고 있었다. 선생은 붓을 들어 전 동래부사 고경명, 전 사간원 정언 박광옥, 전 영해군수 최경회, 전 정랑 정심 등에게 궐기를 호소하는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무도한 도이들의 침공으로 임금은 지금 서울을 버리고 서쪽으로 몽진하고 국토를 지켜야 할 군사들은 각지로 흩어져 망국의 비극을 면할 길 없이 된 판국에 혈기가 남고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중대한 이 사태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루 속히 궐기하여 백척간두에 놓인 나라를 건지고 도탄에 빠진 창생들을 구출하는 방도를 찾도록 합시다. 우리가 당장 앞장을 서서 나선다면 뜻 있는 사민들과 혈기 있는 장정들이 반드시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호소문을 받은 고경명 선생은 광주 담양을 중심으로, 최경회는 능주를 중심으로, 정심은 고향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나주에서는 선생의 연락을 받은 산숙 양산룡, 송제민, 이광주 서정후, 임환 등이 주축이 되어 3백 명의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출발에 앞서 선생은 훈시를 했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평민이 아닌 군사가 되었으니 반드시 군규를 지켜야 하는데, 첫째 모든 행동은 상명하복으로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둘째로는 민가에 들어가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어야한다. 덧붙이건대, 만일 노부모를 모시고 있거나 건강에 지장이 있는 사람은 지금 당장 귀가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하는 날에는 나라에서 반드시 전공을 치하, 큰 상을 내릴 것이다."
훈시가 끝나자 김천일 의병부대는 북방을 향하여 곧 행군을 시작하였는데 도중의 곳곳에서 합류하는 자가 속출하여 일행이 전라도를 지나 충청도의 금강에 이르렀을 때는 그 수가 1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3. 의병들의 눈부신 활동
수원에 도착하자 선생은 독성산성을 점령하고 유격전을 시작하였는데, 금령싸움에서 15명의 적을 죽이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고, 8월에는 전라병사 최원과 강화도로 본진을 옮겼다. 강화도는 서해의 연안을 통해 조선의 남북을 왕래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는 섬이었다. 선생은 양산숙 정현을 임금이 있는 평안도 의주의 행재소로 보내 한강 이남의 전황을 보고하였는데, 그것을 받은 조정에서는 몹시 기뻐하며 당부를 했다.
“그대들로 인해 비로소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였구나 어려움이 많겠지만 조금만 더 분발하여 빼앗긴 서울을 회복하고 왜적들을 완전히 이 땅에서 몰아내 주기 바라노라."
조정은 선생에게 장례원판결사라는 관직을 제수하고 창의사라는 군호를 내려 공식적으로 군사적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선생은 교서를 작성하여 전국 각지의 군사와 의병들에게 전달하였다. 가뜩이나 조정의 소식을 갈망하고 있던 관군과 의병들은 비로소 힘을 얻기 시작하였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4. 아아! 진주성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진행되던 1593년 4월, 왜군이 경상도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그 뒤를 좇아 함안에 이르렀는데, 왜군들은 밀양 동래 주둔군과 합류하여 10만 대군으로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 일전에 진주성 참패를 설욕하고 강화회담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주는 지리적으로 경상도에서 호남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당시 바닷길은 이순신 장군의 무적함대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전라도 진출을 위한 육로로 진주성 공격이 필요했다. 하지만 김시민 장군의 활약에 실패를 맛보았다. 전라도는 군량 보급지로서도 꼭 필 요한 지역이었다.
1593년 6월, 가토기요마사, 고니시유키나가, 구로타나가마사 등의 10만 대군이 드디어 진주성을 포위하게 되자, 도원수 김명원과 전라순찰사 권율은 의령까지 내려왔지만, 적군의 기세가 엄청난 것에 놀라 물러나버렸고, 명나라 원군 역시 방관만 하고 있었다.
모두가 주저하고 있는 판에 창의사 김천일 군대는 양산숙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복수장군 고종후, 사천현감 장윤 등과 더불어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성안에는 이미 김해부사 이종인이 들어와 있었다. 뒤를 이어 의병장 강희열, 이해가 도착하였지만, 성내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6만, 7만 명은 모두가 비무장 평민들이어서, 적군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리한 형세였다. 1593년 6월 20일 적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싸움은 20일부터 29일까지 10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선생은 몸이 불편했지만 생사를 초월한 용기로 맹호처럼 싸웠다.
그러는 동안 의병장 김준민, 장윤, 황진 등이 적탄에 맞아 쓰러졌고, 적들은 성안을 넘볼 수 있는 토산을 쌓아 그 위에서 대포와 조총을 쏘아댔다. 아군 역시 성내에 높이 토산을 쌓아 그 위에서 현자포를 쏘아 적진을 날려버렸다. 가죽으로 몸을 싸고 다가와 성에 구멍을 뚫고 있으면 커다란 돌덩이를 굴려 압살시키거나 끓는 물을 쏟아 내렸다.
군사와 백성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결사적으로 싸웠건만 중과부족이었다. 성안은 피바다가 되고 시체는 겹겹이 쌓여 산더미를 이루었다.
"못난 이 아비가 부덕한 소치로 수많은 생명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구나. 그러나 아무리 궁지에 몰렸기로 우리는 더러운 왜놈들의 총칼로 조상으로부터 받은 깨끗한 몸을 더럽힐 수는 없다. 황천이시여! 이 몸을 던져 대신하겠으니 존귀한 금상과 애잔한 백성들을 불구덩이 속에서 구해 주소서!"

촉석루에서 아들 상건의 손을 잡고 남강으로 뛰어내려 생을 마치니 선생의 나이 57세였다. 성안의 모든 생명이 희생된 끝에 진주성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지만, 적들 역시 이 싸움에서 치명적인 타격을입게 되어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왜적들이 물러간 직후 둘째 아들 상곤이 시신을 수습하러왔지만, 이미 유실되어버린 후였다. 대신 선생의 두건, 왜적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칠언장시 십칠언을 석축 틈에서 발견했다. 나주에서는 선생이출정할 때 남겨 놓았던 모발과 손톱, 치아를 유체 삼아 장례를 치렀는데, 혼령은 나주의 정렬사(旌烈祠)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사당과 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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