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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남파고택을 보았다 하는가

  • 작성자 사진: 나나
    나나
  • 2019년 5월 25일
  • 2분 분량

마당 깊은 집의 유물들



남파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263호) 은 나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문화명소다. 조선 후기 (1884년) 남파 박재규가 지었고 1910년과 1930년 두 차례에 걸쳐 개축을 했는데, 단일 건물로는 전남 일대에서 최대 규모다. 특히 관아에서 공적 용도로 사용할 것을 가정하고 지었기에 개인주택이면서도 관아의 형태를 지니고 있고 당시 지방 상층부의 주택 구조를 그대로 지니고 있어 건축적 가치가 크다.

하지만 집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남파고택을 보았다 할 수 있을까. 잘 지켜진 고택의 건축물이 남파고택의 겉이라면 남파고택의 깊은 속은 따로 있다. 미로처럼 오밀조밀한 고택 곳곳에 간직된 수백 년 된 세간들과 유물, 그 깊고 생생한 보물들을 만난 후라야 우리는 비로소 남파고택을 보았다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낸 삶이야말로 가장 선명한 역사의 흔적이자 아름다운 문화'라는 깨달음을 주는 집이 남파고택인 것이다.


100년 된 태극기, 나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 썼던 일기장, 나주반과 뒤주, 찬합과 반닫이 같은 생활도구 등 집안 곳곳에 숨은 1만여 점 이상의 근현대 유물 가운데 일부를 남파고택의 주인이자 산증인 박경중(72) 사단법인 전남종가회 부회장의 허락을 구해 소개한다.



“나주사람들은 이 태극기로 해방을 맞았다"

박경중씨의 증조부인 박정업 선생이 마련한 것으로 190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태극기는 나주항일의병운동부터 3.1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8.15해방 기념식까지 굵직굵직한 역사현장에서 함께 했다. 군데군데 손상되고 빛바랜 광목천에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진다.



독립운동가 박준채 선생의 공부방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나주역 사건의 주인공인 박준채 선생이 머물던 방이다. 박준채 선생이 실제 사용하던 책 등 유물로 가득하다.



일제강점기의 기록 박준삼 선생 일기

일제강점기의 기록 박준삼 선생 일기

박경중씨의 조부인 박준삼 선생은 청년운동과 독립운동 등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박준삼 선생이 유년기부터 직접 작성한 메모, 편지, 일기 등 개인기록물부터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잡지, 신문, 교과서 등 수집기록물까지 다양하게 보관돼 있다.



아낙네들의 마음과 삶이 보이는 정화수와 아궁이 부엌

요즘은 보기 힘든 아궁이, 벽면에는 그을음이 가득하고 손때 묻은 커다란 가마솥이 정겹다. 특히 아궁이는 부엌 바닥보다 깊게 파서 불구멍을 설치해 불기운이 건물 전체를 타고 올라 갈 수 있도록 설계됐다. 가마솥 바로 앞에는 매일 아침 떠놓은 정화수가 자리 잡고 있다.


옛사람들의 아웃도어 용품 도시락함과 수통

남파고택은 목기로 된 수통과 도시락함, 찬합, 각종 목기 그릇, 목기쟁반 등 다양한 생활용 품을 지금까지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소반 나주 소반

나주 소반은 통영 소반, 해주의 반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소반으로 꼽힌다. 나주 소반은 장식이나 조각 없이 튼튼한 짜임새로 견고함과 간결함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남파고택에도 이러한 나주반이 여러 개다. 박경중씨는 자신이 만 5세 때 받은 독상이었던 나주반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나주소반과 목기가 가득한 대청마루 시렁

안채 대청마루는 집안 살림의 역사가 담긴 곳이다. 대청마루에는 쌀을 담아 보관하는 뒤주가 있고, 천장 가까이에는 시렁을 달아 각종 소반과 목기, 자주 쓰지 않는 그릇 등을 보관하고 있다.


글 박정미 / 사진 최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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