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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시간

봉황면 죽석리



뜨거웠던 한 시대의 증거, 봉황파출소 옆 미곡창고 벽화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을 바람이 흔들고 있다 봉황파출소 옆 벚나무에서 연분홍 꽃비가 내린다. 꽃비가 잠시 멈추자 파출소 옆 미곡창고 벽에 드러나는 건 거대한 벽화다. 주먹을 불끈 쥔 농민 누렁소의 눈빛조차 예사롭지 않은 벽화, 80년대 대학가 걸개그림풍의 그림 가장자리에는 빛바랜 구호가 남아있다. 수퍼 301조 결사반대, 봉황농민 대동단결, 외국농산물 막아내자.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사나흘을 꼬박 매달려 그렸습니다. 90년대 초반 WTO 반대싸움이 한창이었을 때여서 봉황농민회 회원들 수도 상당했죠. 그때는 당시 봉황농민회 총무를 맡았던 곽영길씨 이야기다. 농민회에서는 고기를 삶고 새로 김치를 담가 학생들을 대접했단다.

사실 나주는 농민들의 의식이 남다른 고장이다 60여 년에 걸친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에서부터 80년대 수세폐지싸움에 이르기까지 나주 농민들이 일궈낸 일들은 한국 농민사의 가장 뜨거운 페이지에 해당된다. 봉황파출소 옆 미곡창고 벽에 남은 저 벽화는 불꽃같았던 나주농민사의 한 찰나였으리라.


오시나상사는 문을 닫고, 빈 집만 덩그라니


면소재지 한 가운데로 걸어가는 길은 한적하다. 리어카와 자전거를 수리하던 오시나상사는 문을 닫은 지 오래. 칠팔년 전쯤 이 근처에 있던 봉황주조장이 없어졌다는데, 주조장 막걸리를 배달하던 자전거도 거름이며 이런저런 것들을 나르던 리어카도 이 집 덕을 봤다고 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일러주신다. 자전거나 리어카가 해온 일을 경운기며 트렉터가 대신하면서 오시나상사는 더 이상 손님을 기다리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농촌처럼 지속적으로 비어만가는 곳이 또 있을까. 면소재지 앞길에도 빈집이 여럿 보인다. 옛 주인이 붓글씨로 써서 액자에 담아둔 시 한편이 봉황로 743번지를 지키고 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죽석리에서 만난 사람들



락원사진관 박기수 사장

낯선 마을여행자들의 카메라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이가 있다. 락원사진관 박기수(80)사장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무언가를 하게 되면 그 이름은 반드시 락원이라고 지어야겠다고 맘을 먹었었지. 낙원이 아니라 락원."

락원사진관은 이 자리에서만 60년째다. 개업을 하고나서 대한영업사진사협회에서 주는 자격증도 득했다. 아직도 사진관 벽면에 떡하니 붙어있는 1963년 발행 민간자격증이 젊은 사진사의 자부심을 그대로 전해준다.

"예전에는 사진관이 너무 잘되어서 2층에 예식장도 들였어요. 지금은 결혼할 젊은 사람도 없지만, 누가 여기서 예식을 하겄어요. 급하니 주민증이나 여권사진 필요한 손님이나 오제."

봉황사람들의 빛나던 순간마다 셔터를 눌렀을 박기수 사장 팔순의 사진사는 지금도 날마다 문을 연다. 평생 해오던 일이라서 그렇다.



유신참기름 집 정염효 이경순 부부

구석마을에는 50년이나 된 참기름 집이 있다. 정영효(84) 이경순(80) 내외가 운영하는 유신참기름 집.

“기름집 이름을 뭐로 할까 하던 차에 바로 앞 구석정미소에서 일하던 친구가 하는 말이 지금이 유신정권인께 유신참기름이라고 허소, 그러길래 그냥 그렇게 지었소. 근디 나중에 사람들이 인자 세상이 바꿔졌응께 기름집 이름도 바꾸라고 해싼단 말이요. 그 말도 맞는디 오래 되았응께 그냥 두요. 허허."

정영효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유신참기름 작명 이력이다.

뒷마을 대실에서 태어난 1936년생 정영효 할아버지는 이승만 정권 때 강원도 홍천으로 군대를 갔다와서 이 마을에서 6.25를 겪었다. 면사무소 앞에서 살 떨리는 인민재판을 하는 것도 봤다. 험한 세상을 겪었지만 이 참기름 집 덕분에 사남매를 잘 키워냈다.

힘이 들 때는 흉년이었다. 지금이야 중국산, 인도산 수단산까지 수입 깨가 들어오지만 예전에는 흉년이 들면 기름 손님도 뚝 끊어져서 사뭇 다급하면 남의 집 일을 다니기도 했다. 오십년 참기름 집에는 오랜 단골들이 많았는데 그 단골의 자녀들이 다시 대를 이어 단골이 되었다. 전국에서 오는 택배 주문이 그 증거다. 대를 이어 찾는 단골들의 세대교체 현상을 할머니께 물으니 한마디로 답을 하신다.

"나는 잘 모르는디 손님들 말씀이 유신참기름은 '양심가라고. '양심가라서 온다고”


현대미용원 오병교 이발사

구석회관 가는 길목에 있는 현대이용원은 아침 6시가 넘으면 문을 여니 모르긴 몰라도 전국에서 가장 빨리 문을 여는 이발소가 아닐까.

현대이용원 오병교 (68) 사장은 지금은 폐교가 된 봉황북국민학교 20회 졸업생이다. 40년 전에 이 이발소를 인수해서 아직껏 그대로 운영을 하고 있다.

60년대 광주 산수동에 있던 전남이용고등기술학교에서 기술을 배웠다.

“나주 이장님들은 거의 우리 이발소 단골이라고 보시믄 돼요. 하도 손님을 많이 상대하다봉께 선거출마자들이나 면접 갈라고 와서 이발하는 사람들 딱 보믄, 아! 이 양반은 붙것다 떨어지것다 당락이 대충 보인당께요.”

나주 지역 신사분들의 헤어스타일은 오병교 사장의 손에 달려있다고 보면 될 듯싶다.


봉'S커피 김경란 바리스타


봉황면 죽석리에서 가장 젊은 시간대를 열어가는 곳은 스물아홉 바리스타 김경란씨(29)가 운영하는 <봉'S커피>다.

경란씨의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이 마을에서 배농사를 짓는단다. 이제는 동네 어르신들도 곧잘 드신다는 봉'S커피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봄바람에 꽃잎과 먼지가 길 위에 구른다.

 

글 김인정 / 사진 최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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